백성훈
▲시편 설교 시리즈의 백성훈 목사.
첫째, 하나님 왜 악한 이들이 성공합니까?

성경이 말하는 악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윤리적인가, 양심적인가를 묻기 전에,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물론 반대로 바른 신앙을 가졌다면 윤리적이고, 양심적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른 신앙을 가졌다면 윤리적이고 양심적인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한 신앙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편 94편의 본문에서 말하는 악은 조금 더 세부적으로 구분됩니다. 하나님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폭력과 갑질로 윤리적·양심적 문제까지 일으키는 사람을 말합니다. 지금도 많은 폭력과 갑질이 여기저기 생기고 있습니다.

시인이 살던 구약 시대에는 지금보다 더 이런 상황들이 많았습니다. 그때는 악인이 세상을 독재하여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지배 아래 고통을 당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창세기 시절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출애굽 시대에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함께하셨고,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습니다. 이런 눈에 보이는 기적을 베푸시며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셨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악인들이 세상을 지배하며 다스렸습니다. 시인도 그 고통 속에 살며 왜 악인이 성공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데 왜 악인들이 저렇게 성공하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 그들이 마구 지껄이며 오만하게 떠들며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자만하나이다(3-4절)”.

둘째, 하나님 왜 의로운 이들이 실패합니까?

구약 시대, 악인들의 성공은 반대로 의인들의 실패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평등은 계급적 사회 구조 속에 갇혀 버렸고, 사회 정의는 수많은 거짓 우상들 속에 종교적 합리화로 갇혀 버렸습니다.

그래서 개인이 아무리 정의롭고 선한 삶을 산다 해도 계급과 우상의 거대한 틀 안에서 영향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당시의 권력자들 외에는 대부분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영화 ‘노예 26년’은 1800년대 미국의 노예제도의 슬픈 역사를 보여 주었습니다. 당시 남부 지역은 노예제도를 시행 중이었고, 북부 지역은 노예제도를 없애고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1841년 북부 지역에서 노예 수입을 금지하게 되자, 노예 수급이 어려워진 농장주들이 북부에서 흑인들을 납치하는 악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주인공이며 음악가였던 ‘솔로몬 노섭’은 이들에게 납치되어 12년 동안 농장의 노예로 살게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2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하물며 구약 시대의 노예들은 얼마나 더 고통을 당했을까요? 전쟁에서 패배한 민족은 곧 노예가 되던 시대였습니다. 이들의 고통은 성경이 아니어도 많은 역사의 기록에 구체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시인이 이번에는 이런 의인의 실패를 묻습니다. 악인이 성공하는 것도 억울한데 왜 의인들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백성을 짓밟으며 주의 소유를 곤고하게 하며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들을 살해하며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하나이다(5-7절)”.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를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란 범죄에 대하여 반드시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이 공의의 성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연결됩니다.

필자가 주일학교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어떤 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그냥 말 한 마디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면 되잖아요? 왜 힘들게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어요? 왜 고통스럽게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 말로 용서하셨으면 덜 미안할 것 같아요.”

이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답을 해야 할까요? 필자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어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해. 벌을 안 받고 용서만 받으려면 안 되잖아. 그런데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라 벌도 안 받았는데 용서하지 않으신단다. 그런데 사람들의 죄가 너무 커서 그 어떤 벌로도 용서받을 수 없었어. 그래서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그 벌을 대신 받으신거야.”

이처럼 하나님의 공의는 자신을 내어주기까지 하면서 지키시는 그분의 성품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성품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품이시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습니다. 사랑의 성품이시기 때문에,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류의 죄에 대하여 반드시 벌을 받게 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시인은 앞선 두 가지 질문 속에 답을 찾았는데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었습니다.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12-13절)”.

하나님의 공의를 묵상할 때, 평안과 위로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도 알 수 없습니다. 시인은 이 진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장에 눈에 보이는 세상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믿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선포했습니다.

“심판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따르리로다(15절)”.

그렇다면 우리는 그 심판을 믿고 기다리며 무엇을 또 묵상해야 할까요? 바로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을 고백하는 자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기다리며 누렸던 것을 고백할 때 평안(13절), 위안(19절)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 이 두 가지 은혜가 동일하게 역사합니다. 비록 세상의 눈으로 보면 고난의 삶으로 보이겠지만 은혜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길을 걷고 있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그 뜻을 알아가다 보면 알게 됩니다. 세상의 부와 권력, 명예가 아무리 부럽다 해도, 하나님 주시는 평안과 위안은 그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참 기쁨과 행복임을 알게 됩니다. 시인은 이제 이 고백을 올려드리며 자신이 즐겁다고 말합니다.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19절)”.

이것이 어떤 시대와 상황을 살든지 필요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즐겁게 합니다. 그리고 시인의 마지막 고백(22절)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요새이시요 우리의 피할 반석이십니다.

지금 우리 인생은 어떻습니까? 그 평안과 위로가 있습니까? 만약 세상의 권세 앞에 고난을 당하고 있어 괴롭다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평안과 위로를 누리십시오. 우리 영혼이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백성훈 목사(김포 이름없는교회)
<시편의 위로>, <시편의 소망>, <팀사역의 원리> 저자